신라재상 휘 순유께서 신라 멸망 후 이곳 성주로 은거해 자손이 퍼졌다.
천년이 넘는 성주이씨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 후 고려 원종조에 시조공의 11대손 성주호장 휘 장경께서는 합주군부인이씨를 맞이해 5남1여를 두셨다. 장남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정절공(貞節公) 백년(百年), 차남은 참지정사(參知政事)원사추봉 농서군공(隴西郡公) 천년(千年), 삼남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숙헌공 만년(萬年), 사남은 개성유수 요산제공(樂山齊公) 억년(億年), 오남은 정당문학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 이시다.
휘 장경선조는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나라에 크게 공헌함으로서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 부원군(興安 府院君) 도첨의 정승(都僉議 政丞) 에 제수되어 성주이씨를 크게 일으키셨으므로 후세들이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손자 중 승경(承慶)이 중국 요양성 참지정사가 되어 큰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농서군(隴西郡) 선칙봉군 하고 위 2대도 농서군에 추봉되어 한때는 농서이씨로 부르기도 했다.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성주 목으로 승격된 지명을 따라 관향을 성주이씨로 불렀다.
고려조와 조선을 거치며 천여 년 간 훌륭한 선조들이 수없이 배출됐다. 중시조 이후 8세에 이르기 까지 문형(文衡)을 지낸 선조가 여덟 분, 재상(宰相)을 지낸 선조가 열다섯 분, 식읍(食邑)을 받은 선조가 다섯 분, 부마가 되신 선조가 두 분, 과거에 급제한 선조가 일흔 다섯 분 등 많은 인물들이 나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해 명문대가로 이어졌다.
고려대전에 봉안되고 중요문헌을 남기신 문열공 조년, 참지공 승경, 평양윤 태재공 인기, 경원군 포, 문충공 인복, 문숙공 인임, 성산부원군 인민, 고려삼은의 한분인 문충공 도은 숭인 선조를 비롯하여 개국공신으로 세종대왕 때 영의정을 지낸 문경공 직, 개국공신 경무공 제, 한성판윤 사후, 단종충신 고은 지활, 명나라 임난(壬亂)명장 여송, 대학자인 문경공 일제 항, 한글 최초영비를 만든 승지 묵제공 문건, 3.1독립선열의 한분인 옥파공 종일 등 여러 선조가 문중을 빛낸 대표적인 후예이다.
2007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성주이씨 인구는198,700명이 살고 있으며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거주하고 이씨 115개 본관 중 세 번째로 큰 가문이다.
우리선조들은 예악과 문장에 뛰어나셔서 많은 유문과 시문을 남기셨다. 중시조공 유허지인 봉산제 중건에 즈음하여 이곳에 선조들의 시문과 관련 설화를 담은 비석을 새워 후손들이 그 유향을 맡으면서 선조들의 혁혁한 유덕과 절절한 유지를 길이길이 돼 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