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재는 성주이씨 중시조(中始祖)이신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묘소(墓所)가 있는 곳으로 성주이씨의 구심점(求心點)이 되는 곳이다.
공(公)의 묘소(墓所)는 처음에는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星州郡 月恒面 仁村里) 선석사(禪石寺) 옆 비호석봉(非乎石峰)에 모시어져 있었으나 훗날 공의 후손들이 날로 번창하게 되자 조정(朝庭)의 간신(奸臣) 들이 시기하여 세종(世宗)의 적서(嫡庶) 18王子의 태(胎)를 봉안(奉安)한다는 구실로 1443년(세종25년) 왕명(王命)을 내려 이장(移葬)하게 하니 지금의 이곳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星州郡 大家面 玉花里) 오현 (梧峴)에 公의 배위(配位)이신 합천이씨(陜川李氏)와 함께 이장(移葬)하게 되었으며 그후 이곳을능골(陵谷)이라 부르고 있는데 음력 10月 1日에는 전국의수많은 후손(後孫)이 모여 시제(時祭)를 올리고 있다.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산재(山齋)로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나 향사(享祀)나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수에 비하여 너무나 협소하므로, 1985년 11월 12일 대종회 총회에서 오현재(梧峴齋)를 건립키로 뜻을 모아 9년여에 걸쳐 50여평의 재실을 비롯하여 내외 삼문(三門) 등 부속 건물등을 준공하였다.
유품전시관은 1998년 3월 24일 대종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작업을 시작하여 같은해 11월 19일에 개관 (開館) 하였다. 30여평의 유품전시관(遺品展示館)에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제245호로 지정(指定)되어 안산에 봉안(奉安)된 영정(影幀) 13폭을 사진으로 사본(寫本)하여 전시(展示)하고 있다.
또한 고려조(高麗朝) 문열공 이조년(文烈公 李兆年) 현조(顯祖) 친필(親筆) 병풍(屛風) 사본(寫本), 1613년(광해 5년)에 간행(刊行)된 계축보(癸丑譜)와 성주이씨 역대(歷代)의 족보(族譜) 15종과 주옥(珠玉) 같이찬연한 문집(文集:陶隱詩集, 亨齋集 등) 50여권을 비롯하여, 선현(先賢)들이 남긴 유품(遺品)들과 전국에 산재(散在)한 원사(院祠)의 사진 48점, 국가에 공헌하신 분들의 비석(碑石)사진 22점, 조선조(朝鮮朝) 명종(明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이언충(李彦忠)의 묘소(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2000년 4월 22일 발굴된 원형(原型) 시신(屍身)의 사진과 부장품인 의류 24점 중 4점을 모조(模造) 전시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숭조사상(崇祖思想)을 일깨우고 선조의 유덕(遺德)을 익힐 수 있는 배움의 장(場)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星州郡 碧珍面 紫山里 安山村)에 역대(歷代)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에서 도덕(道德), 경술(經術), 문장(文章), 관직(官職)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貢獻度)가 높은 현조(顯祖) 22位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이 있는데, 전국에서도 한자리에 그렇게 많은 영정(影幀)을 모신 곳은 없다고들 한다.
당나라 현종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등을 설치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는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학습기관 이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조 중기부터 보급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신라 불교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계승하였던 까닭에 지방마다 국법으로 건립한 사찰이 있어서 국가에 공로가 현저한 분은 사후(死後)에 반드시 출생지 소속 사찰에 사당(祠堂)을 따로 설립하도록 하고 현인군자 (賢人君子)들은 초상화(肖像畵)를 만들어 후세에까지 그 위업(偉業)을 전하도록 하였으니 서원(書院)과 비슷한 제도라 하겠다.
이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말에 현창(顯彰)한 분이 많아서 중시조 농서군공 이장경(中始祖 隴西郡公 李長庚),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경원공 이포(敬元公 李褒), 초은공 이인복(樵隱公 李仁復), 도은공 이숭인 (陶隱公 李崇仁), 형재공 이직(亨齋公 李稷) 등 여섯 분의 영정(影幀)을 국가의 숭봉(崇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옆 선석사(禪石寺)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嫡庶) 18王子의 태실을 만들게 됨으로서 산소는 오현(梧 )으로 이장하고 사당은 이곳 안산사(安山寺)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그후 선조(宣祖) 14년(1581) 후손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영당(影堂)을 중수(重修)하고 제기(祭器) 등을 새로 비치하였으며, 11년후인 임진왜란때 왜적(倭敵)이 침공하여 영정(影幀) 일부를 훔쳐 갔으나 승(僧) 경종(敬宗)이 나머지 영정(影幀)을 잘 수습하여 땅속에 묻어 보관하므로서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손(外孫) 이덕온(李德溫)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사림(士林)과 더불어 영당(影堂)을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으며,광해(光海) 9년 후손 이욱(李稶)이 경향각지의 친족들과 더불어 네 번째로 중수하고 현종(顯宗) 6년(1665) 6칸 신주(神廚)와 4칸 재실(齋室)을 완성하였다.
경상감사(慶尙監司)의 허가를 얻어 재실(齋室) 동편에 새터를 잡아 유림(儒林)에서 이문환(李文煥), 곽천우(郭天佑) 등이 도감이 되어 영당(影堂)을 새로 짓고 열세분을 추배(追配)하였으니, 밀직사사이백년(密直司事 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參知政事 李千年), 문하시중 이만년(門下侍中 李萬年), 개성유수 이억년(開城留守 李億年), 평양윤 이인기(平壤尹 李麟起), 요양성참지정사 이승경(遼壤省參知政事 李承慶), 대호군 이원구(大護軍 李元具),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 대제학 이인민(大提學 李仁敏), 경무공 이제(景武公 李濟), 한성판윤 이사후(漢城判尹 李師厚)등이고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 정헌공 이광적(靖憲公 李光迪)이 추배된것은 그 뒤의일이다.
숙종(肅宗) 6년(1680) 다시 문정공 이지활(文靖公 李智活), 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 사헌부 전중어사 이조(司憲府 殿中御史 李晁) 등 세분을 추배(追配)하고 춘추(春秋)로 인근 유림(儒林)에서 모여 제사 지냈으나 고종(高宗) 8년(1871)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에 따라 안산영당(安山影堂)으로 이름을 바꾸는 수난(受難)을 겪었다. 그후 병진년(1916) 다시 중수하고 영정(影幀)의 감실(龕室)을 구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제향(祭享)한다.
서원(書院) 앞에 있는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신도비(神道碑)는 철종 6년(1855) 경향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鍾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좨주 매산 홍직필(祭酒 梅山 洪直弼)이 비명(碑銘)을 짓고 판서 응와 이원조 (判書 凝窩 李源祚)가 글씨를 썼다.
영정(影幀) 10현조(顯祖) 13폭은 경상북도 유형(有形) 문화재 제245호로, 영당(影堂)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地方)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진영(眞影)은 별도 봉안(奉安)하고 있고 현재 봉안된 영정은 100여년전에 개모(改摹)한 것이다.
고려 증 삼중대광 시중 도첨의정승 경산부원군 중조추봉 농서군공 이장경 (진영) (高麗 贈 三重大匡 侍中 都僉議政丞 京山府院君 中朝追封 隴西郡公 李長庚) |
문하시중 광평부원군 문숙공 승암 이인임 (영정) (門下侍中 廣平府院君 文肅公 勝巖 李仁任) |
밀직사사 정절공 이백년 (위패) (密直司事 貞節公 李百年) |
성산부원군 대제학공 이인민 (진영) (星山府院君 大提學公 李仁敏) |
참지정사 추봉 농서군공 이천년 (위패) (參知政事 追封 隴西郡公 李千年) |
문충공 대제학 도은 이숭인 (진영) (文忠公 大提學 陶隱 李崇仁) |
문하시중 숙헌공 이만년 (영정) (門下侍中 肅憲公 李萬年) |
영의정 문경공 형재 이직 (진영) (領議政 文景公 亨齋 李稷) |
개성유수 요산재공 이억년 (위패) (開城留守 樂山齋供 李億年) |
흥안군 경무공 이제 (진영) (興安君 景武公 李濟) |
문열공 정당문학 매운당 이조년 (진영) (文烈公 政堂文學 梅雲堂 李兆年) |
한성판윤 판윤공 이사후 (진영) (漢城判尹 判尹公 李師厚) |
평양윤 태재공 이인기 (위패) (平壤尹 泰齋公 李麟起) |
문정공 증 이조판서 고은 이지활 (위패) (文靖公 贈 吏曹判書 孤隱 李智活) |
평장사 요양성참지정사 농서군공 이승경 (진영) (平章事 遼陽省參知政事 西郡公 李承慶) |
문경공 일재 이항 (위패) (文敬公 一齋 李恒) |
삼중대광 문하시중 경원공 이포 (진영) (三重大匡 門下侍中 敬元公 李褒) |
사헌부 전중어사 동곡공 이조 (위패) (司憲府 殿中御史 桐谷公 李晁) |
성산군 대호군 가정공 이원구 (진영) (星山君 大護軍 稼亭公 李元具) |
이조판서 지강공 이욱 (진영) (吏曹判書 芝江公 李稶) |
문충공 문하시중 초은 이인복 (위패) (文忠公 門下侍中 樵隱 李仁復) |
공조판서 정헌공 은암 이광적 (진영) (工曹判書 靖憲公 隱唵 李光迪) |
우리의 본향 성주星州는 가야산, 금오산, 성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낙 동강 지류인 이천伊川이 감돌아 흐르고 있어 산수가 아름답기로 이름 난 곳이다. 성주의 옛 관아 뒤에 수려하게 솟은 봉두산鳳頭山 명당의 봉산재鳳山齋는 성주이씨 중흥시조 농서군공隴西郡公 장경長庚 선조 께서 터를 잡으시고 다섯 아드님을 모두 과거에 급제시켜 자자손손 가문을 번창하게 한 자랑스러운 유허지遺墟地로 후손들이 1856년 유허비를 세우고 1923년 옛 집터에 봉산재를 건립했다.
이곳에 농서군공의 영정을 감실龕室에 봉안하고 매년 단오절에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향사를 봉행 해오다가 일제 강점기 를 거치면서 본향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향사享祀를 맡아왔다.
봉산재는 오랜 세월과 풍우로 퇴락頹落하고 여러 차례의 전화戰禍로 잡초가 무성해 중건의 필요성 이 절실해지자 성주화 수회는 봉산재 주변 대지 1,500여 평을 소유해오다가 대종회로 소유권을 이전하고 봉산재 중건을 건의했다. 이에 전국 종친의 뜻을 모아 대대적인 봉산재 중건사업 계획을 수립했다.
대종회는 1,500여 평의 토지를 추가 매입, 부지 내 가옥 10여 동을 헐고 2009년 한식날 고유제告 由祭와 기공식起工式을 거행하고 같은 해 12월 28일과 이듬해 5월 6일 각각 사당과 봉산재 중건 상량식上樑式을 올렸다. 2011년 3월 22일 사당을 신축하고 봉산재를 중건하여 봉안고유제를 올리 고 준공식을 가졌다. 이 사업은 전국 각처 후손들이 보내온 성금 20억여 원의 재원으로 상덕사 尙德祠, 경모문景慕門, 봉산재鳳山齋, 숭덕문崇德門을 새로이 세워 신축 영당에 중시조공 영정과 5파조 위패를 모셨으며,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유허비를 외삼문 서편으로 이건 중수重修했다. 이와 함께 정부지원금 5억원을 들여 우리나라 문중단위로는 처음으로 선조 시비공원을 조성했다.